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드스톡 페스티벌 (문단 편집) == 개요 == [[http://www.woodstock.com/|웹사이트]] 정식 명칭은 Woodstock Music & Art Fair. 1969년 8월 15일 ~ 17일까지 3일간 미국 [[뉴욕주]]에서 있었던 전설적인 [[록 페스티벌]]이다. 모든 락 페스티벌의 시초이자 1960년대 후반을 휩쓸었던 [[히피]] 문화의 절정이었다. 우드스톡 페스티벌이라는 이름에 나와있는 '우드스톡'은 뉴욕주 얼스터 카운티에 위치한 작은 마을로, 본래 여기에서 행사를 열려고 했기에 페스티벌의 이름에 우드스톡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하지만 우드스톡 주민들의 반발과 정부 당국의 규제로 공연 부지 선정에 어려움을 겪는 바람에 공연이 무산될 위기에 처한다. 그러다가 이 소식을 알게 된 막스 야스거(Max Yasgur)라는 농장주가 73만평에 달하는 자신의 농장 부지를 제공하여 개최될 수 있었는데, 여기는 사실 우드스톡에선 약 100km 가량 떨어진 곳이었다. 또한 애초에 공연장으로 만들어진 곳이 아니었기 때문에 우드스톡은 음향 시설은 물론 화장실이나 급수시설 등 위생 시설이 제대로 설비되지 않았다. 페스티벌 중에 있었던 폭우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해 거대 진흙 뻘이 되기도 했는데 히피들은 낙천적이게도 폭우에 샤워하고 물 웅덩이에서 수영을 하고 놀았다고 한다. 장소를 제공한 농장주 막스 야스거의 시점에서 제작된 영화가 2009년작 [[테이킹 우드스탁]]이다. 최초 3일로 계획된 행사였으나 뜨거운 관객들의 호응으로 1일 연장되어 4일간 개최되었다. 32팀의 밴드가 무대에 올랐으며, 입장객은 최소 30만에서 최대 40만까지로 추산되고 있다. 이들 중 절반은 펜스를 부수고 무임승차했기 때문에 정확한 입장객 수는 알 수 없다. 티켓 판매 수입이 지미 헨드릭스의 32,000달러 개런티 등 출연료와 무대 시설 비용에 미치지 못해 공연 자체는 '''130만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적자를 기록하지만 이후 기록물 영상 저작권등으로 어마어마한 이윤을 창출해 결국 대성공했다. 특히 지미 헨드릭스의 공연이 제일 유명한데, 지미 헨드릭스는 여기서 미국 국가를 즉흥연주하여, '''이펙터를 사용해 폭격기 소리를 연출해내며''' 베트남전과 미국을 풍자했다. [[레드 제플린]]이 이 공연에서 설 예정이었으나 몇달 앞두고 취소했다. 당시 레드 제플린은 1집을 내고 활동을 한창 하던 때인데, [[지미 페이지]]가 밴드 홍보를 위해 모든 러브콜에 오케이를 했다고 한다. 덕분에 멤버들은 잔뜩 지쳤고, 어쩔 수 없이 우드스톡 페스티벌 참가는 무산됐다. 같은 이유로 [[The Rolling Stones Rock and Roll Circus|롤링 스톤스 로큰롤 서커스]] 출연도 고사했다. 1994년과 1999년에 각각 25주년과 30주년 기념으로 다시 페스티벌이 열렸으나 1969년 때의 근본 정신이 사라졌다는 비난을 들었다. 그나마 1994년의 우드스톡 리바이벌 페스티벌은 [[크랜베리스]], [[그린 데이]], [[에어로스미스]] 같은 당시 핫한 밴드들과 베테랑들의 참여에 힘입어 꽤 괜찮은 평가와 흥행성과를 냈고 역대급 공연을 펼치고 마지막 무대에서 악기들을 모두 부숴버리고 퇴장한 [[사이프러스 힐]]을 위시해서 볼거리도 많고 그나마의 의미가 살아있던 공연이었다. 하지만 이 1994년의 성과에 고무되어 MTV가 적극개입하여 [[키드락]], [[림프 비즈킷]]등의 자극적인 밴드들을 라인업에 넣고 개최한 1999년 우드스톡 페스티벌은 강간, 절도, 방화를 비롯한 이런저런 사고와 폭동이 발생해 미쳐돌아가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런데 사실 1969년의 원조 우드스톡에서도 강간, 절도, 방화가 있었다. 대규모로 한껏 들뜬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느슨해진 사람들을 노리는 [[소매치기]]는 으레 발생하기 마련이고, 30~40만명이나 모인 곳임에도 변변한 취사장이나 화장실도 갖춰지지 못한 곳에서 아무 일이 없었다는 건 말이 안된다. 당시의 [[히피]] 문화 덕분에 큰 신경 안썼다는 게 맞겠다. 애초에 1969년과 1999년은 사회분위기나 성 인식 등에서 엄청난 차이가 난다. 하지만 1999년 행사는 폭력배나 부적절한 경호 인원을 고용하여 인사사고가 난 다른 페스티벌들을 상당히 의식했는지, 경비인력을 아예 "평화 경비대"(?) 로 명명하고 남고생이나 남자 대학생 등의 일반 계약직 아르바이트생으로 편성했다. 하지만 질서 유지라는 측면에서 보면 100킬로그램은 족히 넘는 문신 투성이의 총이나 칼을 허리에 찬 거구들이 대배기량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일탈 행위를 살벌하게 지적하는 것이 1999년 우드스톡에서는 더 나은 선택이 되었을 수도 있겠다. 범생이같은 또래 남자들이 돌아다니며 "이건 안됩니다." "저건 하지 마세요." 하고 다녔으니 1999년 관객은 아무도 경비인력을 겁내지 않았다. 99 우드스톡이 끝난 지 3개월 뒤 [[코첼라 밸리 뮤직 앤드 아츠 페스티벌|코첼라 페스티벌]]이 첫 개최되는데, 99 우드스톡을 보고 [[반면교사|큰 교훈을 얻었는지]] 물과 주차가 무료로 제공되었고 현재까지도 20년이 넘도록 계속되고 있다. 50주년인 2019년에도 열려고 했으나 취소되었다. [[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america/904175.html|#]] 다만 2023년에 한국의 한 회사에서 미국 측의 정식 라이센스를 받아서 [[포천시]]에서 진행될 예정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